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귀스트 콩트 (문단 편집) === 사회학 === >과학으로부터 예측이, 예측으로부터 행동이 나온다. >{{{-2 Savoir pour prevoir et prevoir pour pouvoir.}}} >---- >〈실증철학〉 중 콩트에 의하면 인간의 지적 발전은 3단계를 거쳐왔다. 1. 신학적 단계 1.#2 형이상학적 단계 1.#3 실증적 단계 수학과 물리학과 생물학은 신학적,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벗어난 과학으로서, 그가 살던 시대에서도 이미 실증적 단계에 들어왔다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들은 여전히 신학적, 형이상학적 사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콩트는 생각했다. 그래서 콩트는 이 학문을 실증적, 과학적 단계로 발전시키고자 마음먹었다. 그는 이 관점에서 실증적 사회과학을 옹호했고, 그것은 그에 의해 "사회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사회학"이란 용어는 그가 그전에 사용했던 사회물리학physique sociale이란 말 대신 사용하기 위하여 『실증철학강의』에서 도입한 용어이다.] 실증적(positive)이란 말은 다분히 신학적, 형이상학적 사변을 겨눈 용어이다. 그것은 경험적이고 객관적이며 반-사변적이다. 실증적 학문은 지각 가능한 현상들과 경험적 연구를 통해 확정될 수 있는 법칙적 연관 관계에 집중한다. 사회학은 사회에 관한 자연과학이 되어야 하며, 가능한 한 물리학을 모델로 구축되어야 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체계적이고 가르치기 좋다는 의미에서도 '실증적'이다.[* 다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콩트가 말하는 '실증주의'의 개념은 현재의 실증주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콩트가 스스로 정의하기에 자신의 실증주의적 태도란 '공상주의와 반대되는 의미에서 실제적인 것', '맞닥뜨린 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건전한 성찰에 필요한 진정한 목적'을 의미한다. 오늘날 사회학자들이 실증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적 사실을 다루는 데 있어 자신의 가치판단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경험과학적으로 엄격하게 사실과 관찰을 중시'한다는 의미이다. 이 당시 콩트가 실증주의라고 부른 것은 사회학을 '''과학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오늘날 쓰이는 의미에서의 실증주의는 콩트의 사회학 전통이 아닌 [[막스 베버]]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다만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것과 구분이 모호하던 초기 사회학의 발생에서 콩트가 과학적인 태도를 주장하였기에 사회학이 독립 분과로 나타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는 사회 구조(질서)와 사회 변동(진보)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자신의 연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두고 각각 사회 정학(social statics)과 사회 동학(social dynamics)이라 일컫기도 한다. 사회 정학은, 사회의 전체와 부분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부분만 관찰해서는 안되고 그 부분들 사이의 관계적 질서를 연구한다. 사회 동학은, 사회는 여러 부분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면서 역사의 움직임에 따라서 하나의 균형에서 다른 균형으로 이행하기 때문에 이런 균형 상태의 계열적 변화를 지배하는 법칙을 연구한다. 콩트는 당시 새로운 풍조로 떠오르던 [[개인주의]]가 사회를 분열시킨다고 보아서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개혁과 계몽주의는 "서구 세계의 질병"인 [[개인주의]]를 퍼뜨려서 도덕적 위기를 초래했다. 이 "질병"의 주요 증상은 인민주권, 평등, 개인의 자유와 같은 이념들과, 이와 병행하여 나타나는 가족, 종교, 교회 및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이었다. 이 개인주의는 또한 [[홉스]]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전통에서, '분리된 개인'을 바탕으로 한 [[사회계약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콩트는 사회가 '선이 점들로 분해될 수 없는 것'처럼 분리된 개인들로 분해될 수 없다고 보았다. 사회는 오직 집단과 공동체로 분해될 수 있을 뿐이다.[* 콩트에 따르면, 이 집단 중 가장 근본적인 집단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다.] 그는 그의 '사회학'이 중세의 가톨릭교회와 유사한, 새로운 사회의 준종교적 통합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콩트의 후기 저술에서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는데, 이 시기 콩트의 실증주의는 마치 복고주의적 가톨릭 교리가 새로운 세속적 언어로 표현되어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더욱이 말년에 "인류교"를 창시했는데,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고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미국에 "교회들"이 설립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콩트는 보수적 복고주의 사상가인가? 콩트는 두 가지 점에서 보수적 복고주의 사상가들과 구분된다. 첫째, 그는 사회 통합적 힘으로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상을 거부했다. 보수주의 철학자들은 가톨릭적인 원칙들로 복귀하기를 원했지만, 콩트에게 이러한 원칙들은 인간의 지적 발전 단계 중 과거 시기에 속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실증주의적 원칙들에 의해 대체되어야만 할 것들이었다. 둘째, 콩트는 자연과학과 근대적 테크놀로지에 대하여 복고주의 사상가들보다 훨씬 열린 태도를 취했다. 사회에 대한 자연과학으로서 사회학은 새롭고 효율적인 사회 테크놀로지의 토대를 형성해야 한다. 사회학은 사회가 다시 질서 있고 잘 통합된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사회를 이끄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